24년 7월 10일

일상

  수원에 있는 집에서부터 계절학기를 듣는 서울대학교까지는 편도 두 시간이 걸린다. 아침 9시에 일어나서 거지꼴로 느그작 느그작 기어나가 덕영대로를 열심히 빗자루질하는 버스에 몸을 실어 망포역까지, 거기서 대충 아침을 때우고, 舊분당선, 新분당선, 2호선, 버스를 순서대로 타고 나면 그제서야 강의를 듣는 서울대 인문대학이 나온다. 통학을 하는건 중학교를 졸업한 이후 처음이다. 그때와 비교해서 통학 시간은 5배 늘어났다. 처음에는 뭐 이렇게까지 해서 대학을 가야하나 싶었는데, 이걸 몇 주 정도 하니 또 은근 할만해졌다. 이런게 습관이 무섭다고 하는 건가.

  그렇게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은지 어언 3주, 오늘은 중간고사를 보았다. 한자는 얼추 읽을 수 있으니 잘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어려웠다. 한문 -> 국문은 어렵지 않았는데, 국문 -> 한문이 문제다. 문장을 통째로 외워 놓은게 아니라면 아마 못 풀었을테지. 시험이 어떻게 되었는지와는 별개로, 시험 덕분에 오늘은 시간이 많이 남았다. 원래 6시에 끝나는 수업이 4시에 끝났으니 2시간 정도. 딱히 집에 가서 급하게 해야할 건 없었던 관계로, 늘상 그래왔듯이 남은 시간에 서점을 가기로 했다.

  보통 이럴땐 수원역에 있는 알라딘 중고 서점을 들르는데, 오늘 등교하는 길에 서울대 입구역에도 똑같은 중고 서점이 하나 있는 걸 발견했다. 그동안은 항상 등교에 급급하기도 했고, 반대편으로 다녀서 발견하지 못했다. 시간을 거의 남기지 않고 등교하던 매일과 다르게, 오늘은 조금 여유롭게 등교를 했는데, 역시 마음에 여유가 생기면 그동안 못 봤던 걸 발견하기도 하나보다 하고 생각했다. 여유롭게 등교한 이유가 20분 늦게 일어나버린 바람에 아침을 거르고 등교한 탓이라는 걸 생각하면... 이걸 새옹지마라 할지 역설이라 할지 잘 모르겠다.

  중고 서점에 들어가니 익숙하듯 다른 모습이 나를 반겼다. 전체적인 매장 풍경은 비슷하지만, 수원역점과는 책장 배치가 완전히 달랐다. 크기가 수원 쪽보다 작은 탓인지, 책장 높이도 좀 더 높았다. 서점에서 나는 그 미묘한 책 냄새도 비슷했는데, 책 때문인가 잠시 생각했지만 비슷하게 책을 잔뜩 꽂아둔 내 방에서는 딱히 책 냄새 비슷한 것도 나지 않았기 때문에, 아마도 같은 방향제를 쓰는 건가 싶다. 책장을 살피니 입구 쪽에 바로 컴퓨터 책인 '클린 아키텍처'가 중고로 있어서 그걸 집었다. 언젠간 읽어야지 하고 생각했지만, 그게 오늘이 될지는 몰랐다. 그 책을 들고 다니며 친구와 매장을 몇 바퀴 돌면서 만화 얘기를 하거나 더 살 책을 찾아보았다.

  내가 종이책을 살 때의 기준은 다음 두 가지와 같다. 첫 번째, 예쁜가? 두 번째, 적당히 들고 다닐만한 크기인가? 못생겼거나 너무 무거우면 차라리 전자책으로 사는 편이 책장 미관에도 도움이 되고, 실용적이다. 종이책은 책장을 후두두 훝을 때의 그 감성과 표지 디자인 두 가지를 보고 사는거다. 오늘 고른 책은 '악마의 계약서는 만기 되지 않는다' 라는 책이다. 역시 그냥 이뻐서 샀다. 뒤 쪽에는 김초엽 선배님의 심사평이 있었는데, 이건 책을 고른 뒤 발견했기 때문에 책을 사는가 안 사는가 하는 결정에 영향은 주지 않았지만 뭔가 책 내용에 대한 보증을 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외에도 서점 책장에는 디자인이 맘에 드는 책들이 많았다. 소프트 커버보다는 양장이나 하드 커버를 선호하는 편이라서 그런 걸 살까 싶었는데, 제일 맘에 든 북 디자인을 가진 책이 하필 SF였다. 균형적인 독서를 위해 내 방 책장 내 非-SF 소설 할당제를 시행하는 중인 관계로, 그 책은 나중으로 미뤘다.

  카운터의 직원은 익숙하게 "알라딘 회원이세요?" 하고 물어왔다. 늘 하던 대로 내 전화번호를 찍고 있었는데, 문득 중고 거래는 딱히 알라딘 포인트가 쌓이는 것 같지도 않은데 대체 왜 내 전화번호를 뜯어가는 건지 궁금해서 "근데 이거 하면 뭐가 좋아요?" 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뭐 3개월 실적이 얼마 이상 쌓여야 그때부터 포인트가 쌓인다는 등 이것 저것 현대 도서 시장의 정책에 대한 의문을 품게 하는 말들이 지나갔다. 그 중 제일 의문인건 25주년 럭키백인지 뭔지 하는 괴상한 회원제였다. 몇 천원에서 만 얼마 정도 하는 책갈피나 에코백을 하나 사면 1년간 중고 도서를 15% 할인해 준다는 듯 하다. 책갈피 사는 걸로 회원 가입이 된다니 정말 듣도 보도 못한 제도다. 하지만 15% 할인이라면 딱히 안 할 이유도 없다. 오히려 안 하는 편이 바보다. 나는 카운터 옆에 진열된 책갈피들을 살피며 뭐가 좋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전부 하나같이 그냥 금속 쪼가리. 별로 사고 싶지는 않았고, 억지로 하나 골랐다. 책갈피라면 책 겉으로 나와있는 줄이 달려있는 걸 훨씬 선호한다. 그쪽이 가름끈 대신 쓸 수도 있고, 멋도 있다. 새로 산 책갈피에는 보호 필름이 붙어있었는데, 필름을 떼니 책갈피에는 이미 기스가 몇 개 나있어서 이럴거면 보호 필름이 있으나 없으나 상관이 없는 거 아닌가 싶었다. 아무튼 오는 길에 산 책을 조금 읽어봤는데, 은근 재미있었다. 이제 적당히 이 글을 마무리 하고 마저 읽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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